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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e-사람] 백범정신을 전파하는 [영웅 백범]의 저자 홍원식 법학박사님을 만나다 by 지식소통 조연심

소통인터뷰 & 토크쇼/조연심이 만난 e-사람

by 지식소통가 2013. 7. 3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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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높여주면 나는 더 높아진다"는 백범 정신을 대한민국 곳곳에 퍼뜨리며 사는 남자, 백범 김구 선생님과 사랑에 빠진 홍원식 법학박사님을 만났다. 나무 위에서 한 번 피고 꽃송이 그대로 절개있게 떨어져 땅위에서 한 번 더 피는 동백꽃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화로 하자며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2절을 멋드러지게 불러주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홍원식 박사님. 백범 정신으로 북한과의 민간외교에 한 몫을 하고 계신 홍원식 박사님께 백범 정신과 그로 인해 바뀐 인생에 대해 물었다. 



[영웅 백범]을 쓴 홍원식 법학박사




1.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저는 홍원식입니다. 법학박사이며 <영웅 백범>의 저자인 저는, 자타공인 백범맨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1999년 백범정신의 실천을 모토로 한 단체[()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현재 ()PEACE KOREA]를 설립한 이후, 소외 계층 중심의 무료법률상담과 고아원 매월 정기 봉사활동, 백범주제특강, 남북교류활동 및 지원 등을 해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99년 단체를 설립하기 전까지 고등고시 헌법 스타강사로 신림동과 전국 유수 대학의 고시반을 석권한 바 있으나, 2000년 이후로는 백범 관련 특강과 연구 및 저술활동에 중점을 두고 칼럼니스트로, 대학교수로, 여러 사회단체들의 법률자문역으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홍원식 박사의 백범리더십 특강 모습


그리고 현재는 하늘이 제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하는 강연()을 통해 백범정신또는 백범사상을 최대 다수와 최대한 많이 공유하고자, 저를 부르는 곳이면 전국 어느 곳이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현직 경찰 간부 워크샵에서 전,의경 대원들을 상대로 한 순회 강연 등과 지방자치단체 초청 특강 등을 해왔습니다. 최근에는 예비 공직자라 할 수 있는 공무원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강의를 개설하여 공무원강의를 통해서도 백범식 공직관을 피력하는 기회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

 

 

2. 어떻게 재능(Talent)을 찾게 되었는지? 지금의 일을 하게 된 이유는?


(1) 읽고 말하고 쓰는 재능

재능이라기엔 참 평범해 보이는, 누구에게나 있는 참 평범한 능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소 특별한 장애가 있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주어진 이 놀랍도록 소중한 천부적 능력을 남보다 조금 더 빛이 날 수 있게 특화 시킬 수 있는지의 차이가 재능을 결정짓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달란트는 그 크고 작음을 떠나, 하늘이 부여한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부끄럽지만 재능을 찾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재능을 찾게 된 과정은 곧 제가 활동해 온 일과도 자연스레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 저는 읽기를 참 좋아합니다. 거의 병적일 정도여서 어디서든 혼자 있는 시간이 있을 때면 뭐든 손에 들고 읽지 않으면 눈동자가 불안(?)해지는 금단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읽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재능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부분 중 유독 특별한 능력은 <>과 관련된 분야에서 두드러집니다인적인 여러 여건상 비록 사법시험을 치를 수는 없었지만, 고시를 준비한 이들을 가르치며 오히려 고시를 패스한 이들의 자문역을 하고 다양한 단체와 개인들의 법률자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법조문 혹은 법률문서를 보거나 법적인 문제를 들을 때면 마치 제 머릿속에 컴퓨터가 있어서 순간적으로 작동하며 사안을 정리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용이 파악되고 정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능력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의 책에 대한 일종의 강박적(?) 집중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대학생이 되었던 것은 제 인생의 첫 번째 아주 특별한 변화였습니다. 고되고 암울했던 청소년 노동자 시절을 보낸 후 대학이라는 지식의 평야에 들어갔을 때, 저의 느낌은 남들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하여 평범한 학생으로서의 사회화가 미흡했던 저는 그 광활한 대지 위에 힘들게 주어진 시간을 결코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미팅도 축제도 동아리도 여행도 모르는, 대학생의 낭만과는 전혀 거리가 먼 건조한 대학생활을 했지요. 여학생이 말을 걸거나 농담을 해와도 대체 나한테 뭐라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앞만 바라볼 뿐, 어찌할 바를 모르니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요즘 말로 작업을 걸어오는 신호들이었던 것 같은데, 뜬금없이 괜찮습니다라는 말로 쌩 하니 자리를 피해버리곤 했지요.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그녀들은 정말 황당했을 겁니다. 그 시절의 저를 아는 동기들은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 딴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대학생의 낭만을 반납한 대신 저는 온갖 법관련 전공 서적들과 인문학 책들을 대학생 수준을 넘어설 만큼 폭넓고 깊이 있게 탐독했습니다. 그 시절의 풍부한 독서량이 방대한 법지식을 한 눈에 파악하고 정리할 수 있는 재능으로 축적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둘째, 원래는 사법시험 준비를 하기 위해 들어갔던 신림동 고시촌에서 저는 인생의 두 번째 특별한 변화를 가져온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말하기 재능의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학비를 벌며 대학과 대학원 생활을 마치자마자 결혼과 동시에 80년대 상황에서의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반강제로 군에 다녀온 때가 20대 후반이었습니다. 군에 다녀와 보니 딸린 식구가 하나 늘었더군요. 첫 아들이었습니다. 그 사이 저를 대신해 母子를 건사해 주신 어머님을 모시며 가장의 도리도 하면서 꿈도 이루기 위해선 경제활동이 시급했던 저는 제 몸 하나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 제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말 잘 하잖아!” 



홍원식의 경찰 공무원 대상 백범리더십 특강


자원봉사센터에서 강의하는 홍원식 박사님


한의사셨던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지역 유지셨던 아버님마저 자리에 눕게 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시작된 가난한   어린 시절, 몇 가구 안 되는 시골마을에서 골목대장이나 했지 그다지 내세울 것도 특출난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제게 초등 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께서 학예회 때 학생 대표로 발표하라며 웅변을 시키셨습니다. 제법 잘 해내고 칭찬에 상까지 받게 되자 처음 깨달았습니다. 제게도 남달리 잘 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저의 재능을 발견해 주신 그 담임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하며 찾아 뵙고 지냅니다



대학생전국웅변대회 수상사진과 기사



이후 대학시절에는 전국 대학생 웅변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했고, 탄력 받은 저는 군대에서 역시 웅변대회가 있을 때마   다 열심히 참가해 인정을 받곤 했습니다대중 앞에서 하는 연설에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인정받은 바도 있고 가장 자신     있는 이 달란트를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강의는 단순히 목소리가 좋거나 언변이 있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중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압도하는 힘도 있어야 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정해진 시간에 알기 쉽게 이해 시킬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한 융합적인 분야였습니다


또한 이 때 필요한 아주 유용한 능력이 정리와 요약의 기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면서 생존을 위해 남들과는 다른 저의 영역을 구축한 덕에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러한 기술이 체화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고시촌에 들어와 있는 학생들의 상당수는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법대생들이었고 또한 대한민국 최고의 석학들, 특히 3대 석학으로 우뚝 서계신 분들의 헌법이론서로 공부해 온 학생들이었습니다. 어지간한 강의와 책으로는 고시생들이 숭배하다시피 하는 석학들의 아성을 뚫고 장벽을 뛰어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는 단순히 생존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전쟁터에서 패권을 거머줘야 하는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꿈을 위한 투자기간이었던 만큼 속히 최고가 되어 기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조바심과 절박감도 컸습니다.



가족과도 떨어져 고시촌의 하숙집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뼈를 깎는 노력으로 밤낮없이 연구하고 집필한 <통합헌법론>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인사가 되었더라는 말조차 실감이 안 날 만큼 저의 책과 강의는 돌풍을 일으키며 고시촌을 휩쓸었습니다. 강의는 개시하는 날로 매번 선착순 매진 사례를 이루었고, 강의실 하나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몇 개의 강의실을 터서 수 백 명을 받고도 부족해 하루 종일 강단에 서야 했습니다. <통합헌법론>을 필두로 줄줄이 출간한 헌법 관련 저서들이 법학서적으로는 흔치 않은 기록을 갈아치우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했습니다. 원조 스타 강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고시촌을 석권하면서 헌법 강사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고의 주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유수한 대학들의 초청 강의까지 쇄도하면서 요즘의 1인 기업에 준하는 부와 명성을 거머쥐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음 놓고 사법시험을 준비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이 안정될 때까지라는 생각으로 발을 디뎠던 강의시장에서 생각지 못했던 기대 이상의 놀라운 반향을 일으키자, 저의 계획도 두 가지 이유에서 수정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미래의 공직자를 양성하는 것은 저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보다 훨씬 보람되고 가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는 헌법을 더 깊이 있게 연구하고 준비하여 <분단 조국의 통일헌법에 기여>하고 싶다는 새로운 소망이 강하게 저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두뇌들이 제 강의를 들으며 속이 뻥 뚫리는 희열에 감동하고 좋아하고 고마워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강단에 선 저는 소명감을 갖고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제 강의를 듣는 수많은 수험생들이 법조인이나 공직자가 될 터인데, 합격한 이후 그들이 감당할 사회적 역할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가를 생각하니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에만 그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신앙적 양심과 더불어 <통합헌법론> 집필을 위해 임시정부사를 연구하던 중 새롭게 접하게 된 백범 김구 선생님의 정신과 철학에 있었습니다. 공직자라면 백범처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수강생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 미래의 공직자를 대한다는 자세로 진지하게 임하면서 혼을 실은 강의로 그들의 심금을 자극했습니다. 그런 저의 강의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전설적 명강의라는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민족적 강좌> 는 타이틀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강의를 들었던 수험생들 가운데 공직자나 법조인이 되어 사회에서 다시 만나는 사례는 아주 흔히 있곤 합니다. 서초동에서는 길거리를 지나다가도 인사를 건네와서 깜짝깜짝 놀라고, 강원에서 제주까지 각 지역의 각종 공공단체에서 반갑게 아는 체를 해오는 그 시절의 제자들을 만나는 일은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을 만큼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무렵부터 저를 믿고 따르며 제 일을 돕기도 하는 10년 이상, 16~7년 된 제자도 여럿. 더 없는 보람이자 크나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법시험을 포기함으로 잃은 것도 분명 있겠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선택함으로 얻은 것이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셋째,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은 곧 역사가 되지요. 젊은 날의 꿈을 접고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된 저는 그렇게 선택한 길에서 1999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선택, 그 세 번 째 변화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저는 쓰기의 재능을 갈고 닦으며 스펙트럼을 보다 넓히게 되었습니다.

1999년 저는 우연한 기회에 백범 서거 50주기 추모공연(뮤지컬)의 총괄 대변인을 맡게 되었습니다. 공연 추진 주체들간     의 알력으로 인해 추모공연이 무산 위기에 처해졌을 때 이를 수습하며 공연을 무사히 마치는데 조력하게 되었습니다. 홍원식을 오래 전부터 알았던 분들도, 지금의 저를 만나는 분들도, 많은 분들이 어쩌다 잘 나가던 스타강사의 길을 떠났는지, 또 어쩌다 백범맨이라는 별칭까지 붙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십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변 드립니다

운명적인 만남과 역사의 발길에 채여서라고




백범 서거 50주기에 저는 운명적으로 백범 선생님을 다시 만났고, 자석처럼 이끌리듯 그 분의 뜻을 좇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강의를 정리한 저는 안주하던 세계를 홀연히 떠났고, 자비를 들여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줄곧 백범정신을 실천하고 전파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던 만큼 녹록치 않은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범이 역사 속에 박제된 영웅으로만 회고되는 것은 민족적으로 대단히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백범의 정신(사상)을 제대로 알리고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소명감에 감사했던 세월이었습니다.

 

자석처럼 이끌리듯 백범의 길에 들어선 저는 또다시 무언가 걷잡을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책을 써내려 갔습니다. 그것이 저의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 백범 김구>입니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유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소설 [영웅 백범]



하나는, 1999년 단 3일간만 예술의 전당에 올려지고 소멸된 백범 추모 뮤지컬에 대한 깊은 아쉬움 때문이었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더 큰 감동 속에 백범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영웅을 재조명하고 더욱 폭넓게 알릴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절실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한 방편이 어려운 백범일지의 보완재이자 해설서의 역할을 하여 백범을 보다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해줄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출간 이유는 남북교류사업을 추진하면서 북측과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근현대사의 인물이 백범임을 깨닫고, 백범에 관한 책을 북으로 보내 남과 북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국내의 수많은 자료들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도 자료를 취합하고 백범 선생님을 측근에서 뵈었던 생존자 분들을 찾아 다니며 생생한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결국 노력 끝에 이 책 상, 6천 권을 남북정부의 승인 하에 북으로 보내게 된 고무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단체를 자비로 설립한 것처럼 <소설 백범 김구> 역시 제 어머님의 존함으로 만든 출판사를 통해 자체 제작했기 때문에, 현재 이 책은 2004년 북측에 기증했을 당시 언론을 통해 보도된 자료와 몇 권의 기념 소장품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쓰기의 재능이 조금씩 빛을 더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2001년부터 해마다 주요 일간지를 통해 여러 편의 칼럼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주로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과 연관된 것들이었지만, 많은 칼럼들의 결론은 백범의 이야기로 귀결 되어졌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


그리고 불혹을 넘긴 나이, 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단행했습니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것입니다. 북한법에 있어서 국내 최고라 할 수 있는 국민대 장명봉 교수님(현 북한법연구회 회장)의 제안이 있었고, <분단 조국의 통합헌법>에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던 저로서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선뜻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시작할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시쳇말로 그토록 빡세게박사과정을 통과하게 될 줄은. 깐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장 교수님 덕분에 나이 들어 다시 시작한 공부를 아주 제대로 했고, 수 편의 논문들을 보완하고 보충하고 보강해야 했던 트레이닝 과정을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저를 붙들고 안 놔주는 장 교수님 덕분에 5년만인 2005년에 이르러 품에 안게 된 박사학위는 고생의 한을 날려줄 만큼 꿀보다 달콤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래도 학위를 받은 후 5년간은 장 교수님을 직접 찾아 뵙지 않았습니다. 5년의 한이 사그라들 시간이 최소한 5년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박사학위논문 또한 백범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습니다. <통일헌법이념에 관한 연구 백범 김구 사상을 중심으로->가 제 박사학위논문 제목입니다. 사실 이 주제로 학위를 받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교수님들도 많이 당황하셨지요. 그도 그럴 것이 통일헌법의 연구에 백범을 들이댈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고등고시 헌법을 가르치던 당시 임시정부 헌법사를 연구하면서 처음 접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백범 선생님의 사상(철학)을 통일헌법이념과 결부시켜 더 깊이 있게 연구해 보고 싶었고, 그 결과물로 당당히 학위를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도 백범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학문 정립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 역사가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한 그것의 포문을 열어야겠다는 강한 소명감이 저를 붙들었고, 결국 교수님들께서 설득되신 건지 공감하신 건지 모르겠으나 저의 논문은 심사에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백범정신실천을 위해 달려온 지 14, 저는 운명적으로 만난 넥서스 출판사를 통해 <영웅 백범>을 정식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소설 백범 김구>가 모태가 되기는 했지만, 내용도 많이 다듬고 표현도 훨씬 세련되어졌습니다. 책이 출간되고 보니 남북관계가 하루빨리 정상화가 되어 이 책을 다시 북으로 보내고 싶다는 바람이 후끈 달아오릅니다. 기회가 된다면 남북한 청소년들이 함께 <영웅 백범>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대회도 열어보고 싶습니다.

남북한의 청소년들에게 백범정신의 진정한 의미는 다름을 인정함으로 서로 포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길 이 책을 통해 알려주며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면, 한 알의 밀알만한 크기일지라도 제가 부여 받은 쓰기의 재능이 가치 있는 재능으로 역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자신만의 훈련(Training)하는 방법은?

 

      첫째, 30대 때 저는 최고의 브레인들을 훈련시키는 안내자이자 조력자로 그들의 매니저임을 자청했습니다. 그저 강사이길 거부했습니다. 제 강의를 듣는 이들이 단순한 헌법 지식 이상의 것을 얻어가길 바랬습니다. 휘몰아치듯 파워 넘치는 언변으로 수강생들을 휘감으며 들었다 놨다 했지요. 그들은 제 강의를 통해 은연 중에 백범식 국가관, 공직관, 애국심을 담아 갔고,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으며 힘겨운 수험생활을 지탱할 힘을 받곤 했다는 후일담을 전해줬습니다. 그것이 제가 포기한 꿈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분야의 시장을 석권하기까지 누구나 그렇듯 성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는 30대를 저도 그렇게 보냈습니다. 입은 채로 뒹굴어도 절대 구겨지지 않는 단벌의 양복과 여벌의 팬츠, 화이트 앤 블랙 두 벌의 폴라티로 겨울을 나면서도 열정과 노력이 보상으로 되돌아오는 기쁨과 보람에 지칠 줄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온갖 유혹과 안주의 검은 끈이 도사리고 있어 언제든 저를 잡아 끌 태세를 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 팽팽한 텐션이 느껴지는 동물적 감각은 늘 촉각을 곤두세우며 맞서 저항해야 했습니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 승

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저는 새벽 4시 반이면 튕기듯 일어나 새벽예배를 다녀왔고 한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며 끊임없

이 스스로를 담금질했습니다.

 

고시헌법 강의모습



둘째, 거침없이 질주하던 남성들도 대부분 몸을 사리기 시작하게 되는 40, 그러나 백범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저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통일부 장관실 앞에서도, 국정원 마당에서도, 평양 땅 북한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도 포효하듯 호통을 칠 때, 그리고 정의 없는 평화를 비판할 때 필요한 것은 용기만이 아니었습니다. 백범을 깊이 있게 알

게 되면서 내일을 담보할 수 없는, 매일같이 목숨을 내놓고 버텨야 했던 그 엄혹했던 시절을 백범은 어떻게 살아냈을까를 

생각해보니 그 분이 남기신 휘호에 그 답이 있었습니다.


만일 하늘이 나를 도우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로마서 8:31)” 그리고 또 하나, 백범 선생님께서 너무도 귀히 여기시며 애송하셨던 그 유명한 서산대사의 시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적에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이 발자국은 뒷사람의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 선생님께서 고난의 길을 걸으시면서 버팀목 삼기 위해 가슴 깊이 아로새기신 그 말씀들은 흑암 가운데 한 줄기 빛처럼,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등대처럼 제게도 흔들림 없는 하나의 지향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를 당당함과 담대함으로 무장시켜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주어진 하루하루와 감당해야 할 나의 몫에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근과 끈기로 단련시켜 주었습니다.


몇 년 전 저는 믿었던 자에게 일생에 다시 없을 혹독한 배신을 당했습니다. 끝도 없는 수렁에 빠져드는 최악의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상상치도 못했던 비참하고 굴욕적인 나락, 그 여파가 아직까지도 저의 일상을 누르고 있고, 세상의 많은 이들이 저와 비슷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단 한 번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백범정신이 제 삶의 중심을 굳건히 잡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얻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것 해결되지 못한 것 산적해 있는 문제들에만 집중하게 되면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누리기 어렵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의 블랙홀은 좋은 기운과 에너지를 빨아들이며 정신을 훼파하고 시간을 소모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는 스스로를 이렇게 트레이닝하기 시작했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성실하게 다한 후에 그 일의 결과와 성패는 하늘에 맡기기.> 이를 저는 일하고 맡긴 후 평안이라고 합니다. 목적하고 의도한 바대로 잘 되면 잘 된 것이니 감사하고, 설령 생각대로 잘 안되어도 그 또한 결국엔 잘 된 길로 나를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고난과 역경, 실패에 대한 두려움, 배신과 분노, 실망과 좌절의 골짜기를 빠져 나오게 하는 저의 생존전략이자 늘 새롭게 일으켜주는 놀라운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트레이닝 과정에서 터득하게 되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가치는 바로 겸허였습니다. 이는 백범 선생님의 평생 습성이기도 했습니다. 하늘 아래 사람 앞에 겸손(겸허)은 진정한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가져다 주는 위대한 삶의 열쇠가 됨을 깨달았습니다.



백범정신실천을 위한 섬김활동: 13년째 매월 정기적인 고아원 생일잔치봉사


[백범정신실천을 위한 섬김활동: 지역 어르신 3천여 명을 모시고 효행을 주제로 치른 무료 공연, 송해 선생님과 사회 보는 모습]


백범정신실천을 위한 섬김활동


백범정신실천을 위한 섬김활동: 정기적 헌혈(헌혈유공금장)




셋째, 인생 100세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100수를 누릴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저는 이제 반세기를 갓 지나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50대는 남은 삶의 가치를 판가름 짓고 웰에이징well aging을 구축해낼 수 있는 인생 전체 중 아주 중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대학 동기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 왈, “나이 50이 넘고 보니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기력도 없고 흥미도 안 생긴다. 무엇보다 체력에서 딸리고그저 지금처럼만 적당히 유지하며 편안히 늙어가고 싶다.” 

중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냐며 핀잔을 줄까 했으나 차마 대놓고 표현은 못했지만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감사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여전히 꿈을 꾸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며 다시 시작된 50년을 준비하여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심장에서 팔딱거리며, 해발 660m 왕복 8시간의 산행을 하고 돌아와 밤 늦은 시간까지 몇 건의 일을 무난히 처리할 수 있는 건강과 활력이 저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50대는 현역에서의 은퇴를 생각하게 되고,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지고, 노후대비를 걱정하게 되는 시기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만큼 가장 삶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지나 온 과거에 묶인 두려움(회한)과 부쩍 다가서는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감당해야만 하는 현실의 무게는 육중한데, 세상의 시야에서는 도태가 강요되어지는 것만 같은 불일치 속에서 고민은 깊어지고, 제 아무리 한 때 잘 나가던 이들도 눈빛의 촉기가 흐려지며 자신감이 위축되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그에 따른 라이프 플랜도 전격 수정되어져야 한다고 봤을 때, 50대는 무엇이든 가능한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니던 직장에서의 은퇴가 현역에서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세상은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는 현실에 적당히 안주하고 싶다는 수많은 5,60대들의 생각을 무참히 부서뜨릴 만큼 그 안주마저 생각처럼 쉽게 되어지는 세상도 아닙니다.

50, 잘 계획하고 꾸준히 준비한다면 제2의 꿈을 이루기에 충분한 때이며, 평생에 꼭 이루고자 하는 꿈 하나를 위해서라면 하는 일의 변화가 있을지언정 결국 그 꿈을 성취시켜나가는 제2의 도약기가 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되는 남은 50년을 위해!> 가 현재 저의 모토입니다.


이를 위해서도 역시 트레이닝이 필요하지요. 그 트레이닝의 첫째는, 너무도 당연하게 건강관리”, 그것도 철저한건강관리입니다. 건강하면 설령 실패와 굴곡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극복할 힘, 응전의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 건강관리의 시작은 결코 50대부터 해서는 안됩니다. , 담배를 비롯한 온갖 심신의 쾌락에 진탕 3, 40대를 고스란히 바쳐놓고 아차 싶은 50대에 이르러 건강관리를 시작해도 물론 아주 늦은 것은 아니겠지만 50대를 다시 일으킬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하기엔 역부족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젊음이 최상의 무기인 20대부터 꾸준한 노력으로 다져온 건강을 50대에도 여전히 비슷한 강도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트레이닝은, “뇌를 말랑말랑하게 하기입니다. 이것은 건강관리 이상으로 상당한 노력과 트레이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2,30대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40대부터 시작해 50대에 이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구세대인의 반열에 서서히 잠식되기 시작합니다. 자연법칙에 따라 점차 뇌는 굳어져가고 뇌세포도 줄어들며 퇴화해 가는 것이지요. 세상의 변화에 무뎌지거나 변화를 두려워하고, 구태의연해지고, 정의보다는 가장된 평화 뒤에 서는 것을 합리화시키고, 아집의 성이 높아지는 현상들이 생깁니다. ‘마음만청춘이지 않으려면 뇌기능의 퇴화를 경계해야만 하고, 뇌를 말랑말랑하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마음 열기” “생각 깨기” “귀 기울이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런 노력들은 세월의 두께로 채워진 부분들을 비워내는 역할을 하여 그 자리를 신선한 것들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무원강의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저는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느끼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과 자유롭게 인격적인 소통을 할 수 있는 스킬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4. /오프라인 소통(Talk) 전략은?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에서 중점을 두고 현재 전략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분야는 강연()을 통한 소통입니다. 30대에는 공무원강의(헌법), 40대에는 백범강의(백범의 리더십)를 위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둘 모두를 조화롭게 강의하며 지평을 더욱 넓혀 가고자 합니다. 또한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모든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강의를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5.지금까지 시간(Time)을 견뎌온 지혜는 무엇인지?


결코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저의 시간은 버겁습니다. 하지만 저는 밝습니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제가 보낸 힘겨운 시간들을 풀스토리로 듣게 되시는 분들이 있다면 아마도 다시 한번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되실 겁니다.

왜 밝지? 어떻게 에너지가 넘치지? 무엇 때문에 행복하지? 하는 눈빛으로 말이지요.

고통과 좌절, 난관과 실패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어쩌면 먼지보다도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무수한 순간을 제가 견뎌온 최상의 방법은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 욕망이라는 그릇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그릇은 많이 가질수록, 높이 올라갈수록, 가득 채울수록 더 공허해지는 마술을 부립니다. 밑 빠진 그릇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다해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에 괴로워하지 않기 위한 최고의 훌륭한 방어책이 감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혹독한 시간을 지나면서도 생기 넘치는 생활을 하고, 새로운 일을 두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새 힘이 솟구치고, 그리할 수 있는 건강과 소망을 갖고 있기에 행복할 수 있는, 이 모두가 감사하는 습관 덕분입니다.

 

책에서 길을 찾는 북TV365-김태진의 북스타쇼에 출연하신 [영웅 백범]의 홍원식 저자


또 한 가지가 더 있다면,들풀처럼 눕기입니다. 대나무처럼 소나무처럼 꼿꼿함이 필요한 때도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나의 힘과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폭풍이 저 들녘에서 세차게 불어올 때, 나를 내려놓고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람의 때에 들풀처럼 몸을 맡기는 것도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됩니다. 바람의 때는 지나게 되어 있고, 화창한 때는 다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의 뜻을 알기에 들풀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 들녘에서 가만히 엎드려만 있지 않습니다. 바람이 거셀수록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며 소생의 기운을 축적합니다. 다시 일어설 때를 위해서 말이지요.

 

 

6. 인생 최고의 때(Timing)는 언제라고 생각하는지?

 

저의 목표를 이룬 매 순간이 언제나 최고의 때였습니다. 암울했던 청소년 노동자 생활을 청산하고 꿈만 같았던 대학생이 되었을 때가 그랬고, 스타강사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북한으로 제가 쓴 책 6천권을 보냈을 때가 그랬고, 늦은 나이에 받은 박사학위모를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씌워드렸을 때가 제게는 최고의 때였습니다. 그리고 13년 만에 재탄생 시킨 <영웅 백범>을 품에 안았던 순간도 홍원식 개인의 역사에는 최고의 때로 기록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제 삶 가운데 잠시 머물렀던 모든 최고의 때는 그 크고 작음을 떠나 제가 최선을 다해 목표를 성취한 순간들, 그리고 가정을 이루었거나 아이가 태어났던 순간들과 같이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로 인해 기뻐했던 모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아주 많은 순간을 나는 최고의 때로 살았다고 생각하기를 즐겨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무시로 느낄 수 있는 참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자주 많이 느낄수록 자존감은 향상되고, 이는 늘 꿈을 잃지 않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며, 새로운 목표를 향한 열정을 지피게 하고, 소망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뛸 수 있는 새 힘을 충전시켜주지요.

하여 저는 지금 이 순간도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러나 곧 만나게 될 가깝거나 혹은 조금 먼, 최고의 때를 기대하며 준비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기치 못하게 불쑥 찾아 드는 기쁨의 순간들이 있다면, 그 또한 제게는 최고의 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제게 다가 올 준비를 하고 있는 제 인생의 새로운 최고의 순간을 생각하며 습관처럼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매사 감사함을 가지고 사는 백범정신의 홍원식 박사

 

7.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단기적인 목표 중 중요한 하나는, <영웅 백범>을 통해 백범정신을 보다 널리 알리며 저변을 확대할 수 있도록 강연을 비롯한 다양한 컨텐츠를 활용하고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 일환 중 하나로, 최근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진행이 보류되었던 남북공동백범추모행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백범의 사상(정신)이 남북문제를 해결할 대안이자 제3의 이념으로 연구 될 수 있도록 힘을 쏟고 싶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안 중 하나로 남북한 초, , , 대학생들이 개성이나 금강산에서 함께 어우러져 백범 사랑 백일장 대회 및 발표회와 같은 행사를 추진하는 것부터 시작할 계획입니다. 더불어 <영웅 백범>이 다시 한 번 북한에 보급되어 남북간 공감대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꼭 마련해 보고 싶습니다.


중장기적으로는, 오래 전부터의 소망이었던 <분단 조국의 통합헌법>에의 기여와 국가경영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 준비하는 것, 그리고 평생의 꿈인 (사회복지법인)애민재단(고아들과 무의탁 노인들이 상생협력하는 생활 공동체)을 설립하여 소외계층의 행복을 위한 아름다운 공간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계절이 바뀔 때 마다 꽃이 피고 열매들이 맺듯이, 많은 이들의 심장에 기억될 수 있는 좋은 책들을 해마다 탄생시키고 싶습니다.



백범 김구 동상앞에 선 홍원식 법학박사





이번 인터뷰는 백범정신으로 무장한 홍원식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질문이었지만 결코 쉽게 쓸 수 없


었다는 답변이 생각났다. 


"아무리 힘들어도 감사하고, 때가 아닐 때는 들풀처럼 누워 견디며 때를 기다리라"는 실질적인 지혜를 전해주신 홍원식 박사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신으로 백범정신을 전파하고 계신 박사님의 소망대로 남북한의 교류를 넘어 전세계에 한국인의 정신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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