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심이 만난 e-사람] 서강대학교 문화부 교육문화 정유성 교수님을 만나다
사람대접 받으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을 만났다. 그를 만나는 내내 요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토닥여주고 있는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를 만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나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소박한 모습도 이 사람 앞에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서강대 문화부 교육문화 정유성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70년대 귀남이 중의 귀남이였던 그가 어떻게 젠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길을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는지를 심층 인터뷰했다. 강원도여성가족연구원에서 진행될 [자존감을 올리는 젠더토크36.5도 토크콘서트] 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미리 들어보았다.
요즘 근황은 어떠세요?
방학이라 학교에 와서 공부도 하고 학생들 만나고 하면서 교수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 있죠. 거기다 예전부터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사람과 사람끼리 모여 사는 사회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어떻게 재능을 찾게 되셨는지요?
70년대에 대학에 다녔는데 그 시절은 암울하기 짝이 없는 시대였지요. 사람이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때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대접을 하면서 사람다운 세상에서 살아볼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공부가 좋아서 했다기 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걸 찾다보니 저절로 공부를 하게 된 거죠. 사람들 사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들 가까이서 땀냄새도 맡고, 울고 웃는 소리와 함께 술도 마시고 하면서 제가 자꾸 공부할 거리를 찾아가는 편이었어요. 재능에 맞아서 공부를 했다기 보다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하는데 보탬이 되겠다 싶어서 하게 되었죠. 그리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아무래도 열중하게 되고 그에 따라서 마치 광명을 찾아다니듯 자꾸 무엇을 찾게 되죠. 그러다보면 열심도 부리게 되고 그러면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명확하게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정해지면 이것을 하는 데 필요한 공부를 제대로 하게 된다는 말이죠. 금맥을 캐듯이…
제가 넓은 세상 가서 이것저것 보고나니까 사회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고, 필드로는 양성평등 교육부터 시작해서 청소년문화, 대안 교육도 했고요, 근래에는 다문화 교육 쪽에도 관심이 많아요. 저 나름대로 확고한 인간관, 바람직한 사회상이 있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는 여러 가지 원인과 그것 때문에 치이고 다치고 상처받는 많은 사람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죠. 여성들부터 시작해서 다문화 당사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는 우리까지. 그러다 보니까 공부를 그 방향으로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젠더에 대한 공부는 한 마디로 사람에 대한 풍부함 그리고 깊이 있는 이해를 하는데 그만큼 좋은 공부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2대 독자집에 딸 셋에 아들로 태어나 귀남이 중의 귀남이로 자랐어요. 할머니 손에 자란 저는 계란 노른자를 독차지하면서 자랐는데 어느 순간 여성과 남성은 다르고,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순리로 알고 살았어요. 그러다 야학을 하면서 구로 공단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보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왜 사회 변화가 오면 사회 약자들부터 피해를 보는지, 독일 유학을 가서 심한 인종차별을 받고 나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 차별을 받아야 하는 이유인지를 고민하게 된 거죠. ‘아, 그 옛날 우리 누이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내가 핍박받고 성폭행까지 당하고 나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거라 해야겠죠. 사실 남성들은 어떤 심한 소외나 차별의 경험이 없으면 잘 몰라요. 잘 나가는 남성들은 여성들을 이해하기 어렵죠.
야학을 하면서 만나 결혼까지 한 아내와 약속을 했어요. ‘사람다운 세상, 인간에 대한 예의, 이런 것들을 기본적으로 갖출 수 있는 부부가 되자. 아이를 낳게 되면 그렇게 키우자’
그 때 젠더문제가 서구에서는 이슈로 떠올랐고, 제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었어요.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고, 세상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나에 대한 이해도 남성 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로 보게 되고 훨씬 넒어졌어요.
문제는 이게 이론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죠.
법과 제도로 보면 한국사회는 꽤 평등해요. 남녀고용평등법부터 시작해서 호주제폐지에 이르기까지 지난 25년 동안 거의 모든 법이 완비되어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조사해보면 아랍권보다 여성들의 행복지수, 인권지수 이런 것들이 낮아요. 그 이유가 뭐냐면 머리에서 그쳐서 그래요.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끼리 사는 삶에서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과 문화와 의식의 차원으로 해결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려운 거죠. 그게 제일 어려워요. 하지만 그렇게 여성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삶은 결국 자기들이 이득을 취하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어떻게 훈련하셨는지요?
젠더 관련 공부가 그렇게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쉽지 않아요. 오랫동안 버릇이 들었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거기다 대한민국에서 괜찮은 대학의 교수라 하면 기득권 세력이라 할 수 있다보니 편한 삶의 유혹이 끊이지 않아요. 거기다 말은 그럴싸하게 할 수 있지만 작은 실천을 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여러 노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어요.
우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또하나의 문화]라는 집단에서 고민도 같이 들어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젠더와 관련된 수업을 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젠더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은 저 하나였고, 질책과 비난도 꽤나 많이 받았어요. 그 때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로부터 위안과 응원을 받으며 힘을 낼 수 있었지요.
그 다음은 가족의 힘이 중요했어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아내는 가장 가까운 동료이고, 지원자면서, 가장 무서운 감시자이기도 했어요. 아들 또한 저보다 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에요. 그런 주변이 늘 저를 깨어있게 했죠. 이 길이 외롭기는 했지만 저 또한 나를 인정하지 않는 쪽을 멀리함으로써 나를 단련할 수 있었죠.
온,오프라인 소통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젠더십을 가지게 되면 남자들도 굉장히 독립적으로 살게 되죠. 어딘가 누군가에게 비굴하게 기대 마음은 아닌데 몸만 기대는 일이 줄어들면서 투명한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젠더 마인드를 갖게 되면 공감능력이 확장되어 제대로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요. 저는 남자치고는 감수성이 예민해서 문학도 좋아했는데 젠더십에 대해 공부하면서 감수성을 개발하게 되었어요.
교수로서 학생들과의 소통에도 도움이 되구요.
온라인은 얼리어답터에 속해요. 온갖 기계들을 다 잘 다루죠. 요즘엔 너무 온라인에 치중하는 것 같아서 오프라인을 강조하고 있어요. 일명 [손편지와 같은 소통]같은 그런 소통을 하라고 해요. 자서전을 쓰게 하거나 전화로 해도 될 것을 반드시 만나서 이야기한다거나 가끔 동료들과 술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상황이나 느낌까지 전하는 거에요. 마치 손편지 쓰듯이 말이에요. 너무 빠른 SNS 소통은 서로가 서로를 외롭게 만들어요. 하고 싶은 말만 짧은 메시지로 전하게 되니까 세상이 점점 삭막해지는 거 아닌가 싶어요. 오해과 곡해가 범람하게 되고, 익명성을 무기로 함부로 말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지요.
헬조선도 마찬가지예요. 결국은 자아정체성이라는 것은 내가 나와 맺는 관계에요. 내가 너무 한심하거나 화가 나면 거울을 보고 내가 나한테 얘기하잖아요. 그때 나와 맺는 관계가 자학적이고 폭력적이 되면, 그건 망가지는 거죠. 헬조선은 내가 나한테 하는 폭력과 같아요. 내 나라인데 내가 내 나라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은 내가 망가졌다는 징조인 거죠. 예전에는 먹고 살기 급급해서 우울증이라는 병은 들어볼 수도 없었어요. 그러다 먹고 살만해지니까 여기저기서 우울한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에 상처를 받은 자아가 현재의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거죠.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 전통조차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어요. 고정과념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이런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뜻이 맞는 사람들과 뜻을 모으는 거에요. 공동체로 조금씩 힘을 합쳐 나가다보면 결국은 행복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가득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우리나라의 40대를 한 마디로 ‘사회의 병리, 육체의 손상, 영혼의 노숙’으로 표현할 수 있지요. 총체적 난국을 맞이한 그들에게 작은 일탈이라도 권하고 싶어요. 나랑 맘에 맞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작은 공동체를 만들거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에서 벗어나 건전한 춤이나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하라고 권유하고 있어요. 요리교실도 다니면서 직접 요리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되죠.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젊은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권하는 것이 ‘명상’이에요. ‘단기출가’나 ‘홀로여행’ 도 좋아요. 자기 자신과 대면할 시간을 가져야 해요. 불편한 자신과 대면하면서 생기는 공포를 극복해야 해요. 인간 자체의 한계와 모순을 인정해야 해요. 인간에게는 한 마디로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데 그걸 늘 의식하고 있어야 나한테 필요한 에너지로 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포자기 하거나 자학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바뀔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필요한 주장과 실천이죠. 제 삶도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구요. 내가 당했던 인종차별이나 온갖 구박과 소외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크는 건 막고 싶은 게 또다른 바람이기도 하지요.
시간을 견디는 지혜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뜻만 앞세워서 살면 사람이 피폐해져요. 그래서 저는 가능하면 내가 하는 일이 뜻도 있지만, 재미가 있도록 애를 썼어요. 소리의 울림과 뜻의 울림이 잘 어울리면 좋은 시라고 하잖아요. 우리 노래도 그렇잖아요. 리듬만 좋아서는 안 되고 가사도 우리의 마음을 울려야지 더 좋잖아요. 그렇게 제 삶도 마찬가지고 내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농담으로 늘 그래요. 내가 만약 좋은 시대에 태어났으면 나는 사실 교육 같은 공부를 안 했다. 어찌 보면 수단 같은 거였어요. 나의 세상을 보는 눈과 지향에 맞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을 좀 깨우쳐야 하겠다. 구태의연한 욕심 같은 거였죠. 그런데도 지금까지 비교적 잘해 왔어요. 운이 좋아서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다른 한편 에너지를 잃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끊임없이 뜻만 세운 게 아니라 재미를 느끼려고 애를 썼던 거에요. 하는 일이 다 재미가 있었어요. 이를테면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었고, 열심히 가르치면 하나라도 더 받아들이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제자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어요. 그 제자들 인생을 여럿 망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요. 저를 만나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요. 비록 허름하게 살지만 너무 행복하다고요.
뜻과 재미를 가능하면 마주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 좋겠어요.
앞으로 남자아이들의 문제를 다룬 [허접한 세상 찌질한 남자들]과 여학생들과 나눴던 청년 담론이 책으로 나올 예정이에요. 그러면 좀더 활발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을 거에요.
전성기는 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언제나 지금, 여기. 특히 저는 20대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때 너무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어요. 그래도 20대 때는 꽤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 때가 전성기고, 30대는 주로 유학해서 공부할 때였으니까 그때도 뭐 행복했고. 40, 50대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늘 지금 당장 뿐만 아니라 향후 얼마 동안 내가 주로 이런 일에 집중해서 해야겠다는 그런 기대 같은 게 있어서 저는 지금, 여기가 늘 내 전성기라고 믿고 살아요.
앞으로 내가 이건 꼭 정말 이뤄보고 싶다 이런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장기적으로 거대담론적인 부분에서는 정말 ‘사람다운 세상’,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고 싶고요, 그 다음 단기 과제는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지금 한국사회 내적으로 가장 큰 이슈인 다문화사회 관련해서 글도 쓰고 강의도 다니고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인구 전체의 5%가 넘어가면 완전 다문화사회로 가잖아요. 한 10~20년이 중요해요. 이 시기에 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엄청난 문제가 생겨나겠죠.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거기에 집중해서 정말 다문화사회가 말 그대로 다양한, 다채로운 삶이 가능한 사회로 가는 그 길목이 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미국은 다인종사회로 ‘소수자보호정책’을 했어요. 소수인종이나 여성들에게 많은 투자를 했고, 그 결과가 오바마라고 보면 되요. 생각해 보세요. 100년, 150년 전에 흑인들은 노예였어요. 그 다음에 68년도 마틴 루터킹의 ‘I have a dream’ 할 때도 시민권조차 제대로 없었어요. 그리고 50년 지나서 그 이후에 교육받고 해서 오바마 같은 대통령이 나온 거에요. 이게 한 사례가 될 수 있어요. 열린 마인드가 중요해요.
편안한 미소로 마치 한 편의 시를 들려주는 듯한 목소리로 사람다운 세상,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을 외치는 정유성 교수님을 보면서 ‘이런 게 진짜 페미니스트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무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결코 모자라지도 않는 젠더십의 이론과 실천의 산 증인을 보았다고나 할까!
남자라서, 여자라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는 정유성 교수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본다. 그것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2015년 9월 9일 오후 2시 강원도여성가족연구원(김영녀 원장)에서 진행되는 '지존감을 올리는 젠더토크 36.5'에서 이 시대의 알프레드 아들러와 같은 감성소유자, 정유성 교수님과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