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인재관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 제왕의 사람을 쓰는 법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8/02/30)
[치평요람]에 나오는 세종의 인재관은 한마디로 "토포악발(吐哺握髮)"이다.
'토포'는 주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대답을 해야 할 경우 몇 번이고 입에 든 음식을 토해내고 대답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악발'은 주공이 머리를 감고 있다가 인재가 왔다는 말에 감던 머리를 붙잡고 나와 맞이했다는 것으로 인재를 귀히 대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성어이다.
율곡 이이가 말하는 세종의 인재관이다.
"세종대왕은 사람을 쓰되 자기 몸과 같이 하였다. 현인과 재능 있는 이를 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임용하고 말을 채택함에 오롯이 하여 참소와 이간질이 들어갈 수 없었다. 또 지위가 그 재능에 합당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이이,<율곡전서>2007 )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재를 보석같이 귀하게 여겼다.
둘째,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덕망과 재능을 우선해 인재를 발탁했다.
셋째, 사람을 뽑고 그들의 말을 들을 때 집중해서 들었다.
넷째, 그 사람의 재능이 그 자리에 적합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인재를 불러오는 것(擧賢)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채택하여 쓰는 것(得用)이다"
<치평요람>
세종의 인재쓰는 법
첫째, 마음 바탕이 착한가를 살핀다. 즉 개인보다는 공동체 전체를 우선시하는지의 여부를 살핀다.
"사람들은 처음에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지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열성적으로 일하다가도 끝을 완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처음부터 열을 내지 않는자일까 보냐"
둘째,집현전과 성균관과 같은 기관에서 인재를 길렀다. 집현전은 세종의 양재용현(養材用賢),즉 인재를 배양하고 등용하는 '인재의 저수지'이다.
"나무를 심고 길러서 큰 목재를 만들어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그 분야에 정통한 인재라야 크게 쓸 수 있다.(大用)"
셋째, 공적으로 허물을 덮게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데 훌륭한 지도자라면 단점보다는 그의 장점을 발견하고 제 위치에 배치해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적합한 자리에 기용해 인재로 키워야 합니다.그리고 전능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적당한 일을 맡겨 능력을 기르는(爲能)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결점만 지적하고 허물만 지적한다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棄短錄長)이 인재를 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데,이렇게 하면 탐욕스런 사람이든 청렴한 사람이든 모두 부릴 수가 있습니다. (강희맹,<시숙재집> )
- 강희맹이 장원급제 한 글이다.
강희맹,독조도,지본수묵,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이는 장점경영을 실천한 것인데 대표적인 사례로 조말생 사건이 있다. 이를 자세하게 소개한 책 "세종, 부패사건에 휘말리다"/ 서정민에 보면 세종이 어떻게 장점을 발휘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로는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24명의 노비를 증여받은 것과 관련된 김도련 노비소송 사건으로 탄핵된 조말생을 병법과 군사에 대한 지식을 높이 사서 다시 복직시킨 것이다.
"조말생이 논어에 나오는 공자 제자 중에서 자로의 과감성과 자공의 달변을 겸한 인재"라 평하며 충성심과 성실함에서 뛰어나고 능수능란하게 일처리를 잘하는 조말생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로 조말생은 세종 15년 최윤덕이 서북면 일대의 이만주 일당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파저가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세종의 싱크탱크 집현전의 비밀
'집현전에 물어보라' 세종시대의 인터넷 지식검색, 집현전
집현전은 오로지 경연을 위하여 두고 경연을 통해 세미나식 국정회의 수준 원했다.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전담하여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는 것이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이다. 즉, 집현전의 역할로 이론과 실제를 동시에 겸하는 것을 중히 여겼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곧 지금 서 있는 좌표를 모르는 것과 같고, 또한 장차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함과 같다.
경서를 깊이 연구하는 것은 실용(實用)하기 위한 것이다. 경서와 사기를 궁구하여 다스리는 도리를 차례로 살펴보면, 나라 다스리는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워진다.
집현전,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로 발전 가능했던 이유
조선 최고의 싱크탱크 '집현전'
첫째, 집현전 학사의 구성과 재임기간이 남달랐다.
전공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10년 이상 함께 지내면서 긴밀한 토론과 자연스런 교제를 거쳐 서로의 연구에 자극과 도움을 주고 받았다.
둘째, 집현전 학사들은 손쉽게 방대한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집현전은 축적기억장치(ROM)와 임의접근 기억장치(RAM)가 탁월했는데 이는 국내외 문헌들의 총집결처였기에 가능했다. 방대한 자료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분류하는 나름의 방법이 개발되어 신속한 정보 습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연구와 정책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었다. 연구한 보고서가 대부분 채택되기도 했다.
넷째, 집현전 학사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들 수 있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스스로를 세종 개인의 연구집단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싱크탱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의 자취를 찾아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그 사례에 대한 철저한 검토, 발생할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그리고 그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친다면 분명 "대한민국의 집현전"이 만들어질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 "사람이 착한 바가 있으면 그 아름다움을 길이 자손에게 미치게 하고, 악한 사실이 있으면 그 미워함은 그 자신에 그치도록 한다." (善善長, 惡惡短) 하였다. (세종실록 17/03/12)
인재검증장치와 인재보호
과거제도만으로는 적당한 인재를 뽑을 수 없음에 3명씩 천거하도록 하여 풍부한 인력풀을 가동했다.
1) 지모와 용력이 뛰어나서 가히 변방을 지킬만한 자 , 뛰어난 장수
2) 총명하여 가히 수령직에 대비할 수 있는 자 , 공정한 지방관
3) 사무에 능숙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극히 번거로운 자리에 감당할 수 있는 자, 명석한 사무관
이 제도는 천거를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상벌이 주어졌기에 반응이 미미했다. 그러나 3년마다 인재를 추천하는 법제가 마련되었다.
3단계의 인재검증시스템
1) 이조의 낭관으로 하여금 매우 정밀하게 간택하였다. 경력과 자질, 그리고 부패혐의, 가족관계까지 살피게 하였다.
2)이조 내부의 관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재차 평론에 평론을 거듭했다.
3)이조 밖의 여론을 들어보는 중론 단계를 거쳤다.
사헌부 관리들의 원탁회의 '원의(圓議)'
사헌부 관리들은 풍헌이나 탄핵을 결정할 때, 그리고 배직된 자의 서경을 할 때 '원의'라고 하여 죽 둘러 앉아서 좌우를 물리치고 격렬하게 토론하곤 했다.( 세종실록 28/01/21)
집단지성 네트워크는 이미 세종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