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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심이 만난 e-사람] 한국의 오드리 햅번을 꿈꾸는 진정한 복지가, 평택,안성 교차로 김향순 대표를 만나다

소통인터뷰 & 토크쇼/조연심이 만난 e-사람

by 지식소통가 2013. 11. 2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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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너머 꿈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꿈을 이루고 나면 분명 그 꿈 너머 마음이 시키는 진짜 꿈을 만나게 된다. 누구나 성공을 목표로 꿈을 꾼다. 100억 이상의 돈을 번다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오른다거나 하는 목표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룬 사람은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된다. 

생활정보신문 교차로에서 초창기부터 신화를 만들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경제적 안정을 이룬 후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며 복지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한 사람, 한 기업의 CEO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면서도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노년은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오드리 햅번처럼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 평택,안성 교차로 김향순 대표를 만났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삶의 행복과 진정한 봉사에 대해 물었다. 



한국의 오드리햅번을 꿈꾸는 미소가 아름다운 여자, 평택,안성 교차로 김향순 대표




현재 하고 있는 일은? 


평택, 안성 교차로 신문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마이빌평택’이라는 포털사이트를 운영하고  정읍교차로도 운영하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는 믿을 수 있는 직원들에게 많은 부분 책임경영을 하게 하고 저는 정기적으로  ‘평택, 안성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봉사단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2002년도부터 시작한 것이 벌써 13년차에 들어섰네요.



함모사 농활




봉사나 나눔같은 재능을 찾게 된 계기는?


첫번째, 평택 지역이라는 곳에 NGO, NPO 이런 사회 단체들이 생성됐던 시기가 2000년도부터였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사회복지협의회, 참여연대, YWCA 등 여러 가지 내로라하는 단체들이 그  당시부터 시작되면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제가 사회복지협의회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사회복지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 생기고 실질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복지 마인드가 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 96년도에 카톨릭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는데요. 세례를 받고 신앙적으로 깊어지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들여다 보게 되고 나의 어릴 적 어려웠던  모습들이 자꾸 떠오르더군요. 내가 어려웠을 때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하기도 했고 외면을 당한적도 있었지요.  그런 어려운 과정에서 제 손으로 공부를 못하고 주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내가 받은 도움을 누군가에게 다시 되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최근에는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공감하기 시작했답니다. 거시적인 표현일 수는 있으나 신앙인으로서의 책임, 사회인으로서의 책임 또는 지역사회의 생활정보신문이기는 하지만 언론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내가  무언가 가진 게 있어서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시각장애인 영화나눔 행복플러스



예를 들어 작년부터 시각장애인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봉사 프로그램을 2년차에 거처 진행하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어떻게 시각장애우가 영화를 볼 수 있지?’ 라며 의아해하지만 그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감각적으로 청각이 매우 발달되어 있어요. 그 사람들은 화면은 못보이지만 감각적으로 소리를 듣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영화를 느끼며 보는 거예요. 처음에 평택의 시각장애인들이 문화적 욕구는 강한데 아무도 이들에게 제공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이들이 한 번은 수원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럼 내가 해야지.’ 그 뒤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돈은 어떻게 하냐, 자원은 어떻게 하냐 이런 걸 생각하지 않고 “그럼 내가 해주면 되죠. 제가 해 준다고 하세요. 다음 달부터 몇 분이 오실 수 있는지 말씀하세요.” 그래서 일단 진행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것이 벌써 1년을 넘었는데 이제는 청각장애인들에게도 영화를 보여달라는 연락이 오더라구요. 복지는 정말 끝이 없는 여정 같아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청각장애인들은 한국영화를 소리로 영화를 보고 청각장애인들은 외국영화를 자막을 통해 보는것이지요 제 능력이 닿는 한, 제가 부족하면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빌어서라도 죽을 때까지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삶의 여유를 선물하고 싶은 게 제 꿈 중 하나랍니다.




보육원 봉사활동




외국인노동센터 김장체험 봉사




청소년대상 영화나눔 행복플러스



오래 전부터 한국의 오드리 햅번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저도 오드리 햅번에 대해 잘 몰랐어요. 회사 직원 중 한 명이 퇴직하면서 ‘존경하는 회장님, 오드리 햅번을 닮은 우리 회장님, 햅번 회장님’ 하면서 편지를 써주고 갔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오드리 햅번에 대해 검색을 하면서 그녀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제가 알고 있었던 오드리 햅번은 [로마의 휴일]에 나왔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면 노년의 오드리 햅번은 머리가 히끗히끗하고 얼굴에 굵은 주름이 있는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미소가 얼굴 가득 빛이 나는 모습으로  깡마른 소말리아 아이를 안고 있었어요. 유니세프 홍보사였던 그녀는 자녀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일기를 남겨주기도 했지요. 그 때 가슴 속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지나갔지요. 




‘아, 나도 이 여인처럼 되고 싶다. 나도 이 여인처럼 정말 아름다운 여인으로 살고 싶다. 김향순이 정말 잘 살다 갔구나.’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내면이 아닌 외면으로 평가하곤 하지요.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오드리 햅번이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구나.’ 를 깨닫게 된 거에요. 그 이후 저는 한국의 오드리 햅번으로 살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게 제 소박한 바램입니다. 





대표님만의 훈련법이 있다면?


<조직관리 노하우>

다른 사람들을 바꾸고 싶으면 우선 나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훈련이 되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킬 자격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듭니다. 2009년 사회환경이 어려워 많은 기업이 힘들어 할 때 저부터 출근시간을 앞당기고 청소도 하며 솔선수범했더니 다른 직원들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많이 합니다. 실질적으로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점점 바뀌는데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과 같은 논리라고 생각해요. 일찍 출근해서 청소 하고 정리도 하면서 부지런하게 뛰다 보니 자연히 회사가 성장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를 다시 직원들에게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더 큰 성장을 하게 되었답니다.  


당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책이 바로 <일본전산>. 

3번을 읽으면서 ‘그래, 나도 회사의 방향성을 다시 적립을 하자.’ 그리고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공생, 상생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리고 내가 지금 이 회사에 또는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공공연하게 내세울게 뭐가 있는가?’ 그런 고민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사훈을 그 때 다시 정립을 했죠. 

The Better 더 나은 것에 중점을 두자는 게 답이었어요.

"더 나은 사원, 더 나은 신문, 더 나은 회사,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 

이를 위해 1. 솔선수범 2. 보상제도 3. 공부 4. 회사의 기준과 같은 가치 포인트 제도를 회사에 도입했어요.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거나, 포럼을 통해 공부를 하고, 학위를 따오거나, 무엇인가 자기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에 대한 점수를 주는 거예요. 또 더 나은 신문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거나 회사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또는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포함한 여러가지  사회 공헌활동을 통하여 상을 받았을 때 이런 모든 것에 가치포인트를 적용했습니다. 개인별 포인트는 적립된 가치 포인트 점수 등급에 따라 1년 동안에 우리 회사 전체 잉여금에서 일정 금액을  정기보너스와는 다른, 특별 보너스를 지급한 거죠. 

 

우리 회사는 다른 회사와  관점이 달라요. 매출을 많이 올렸다고 해서 포인트를 주진 않았어요. 개인의 발전, 신문의 발전, 회사의 발전,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더 나은 것을 위한 The Better에 노력한 사람에 대한 포인트를 주고, 사람을 키우고, 신문을 키우고, 회사를 키우고, 사회를 키우는 거예요. 거기에 집중을 한 거예요. 그렇게 줬더니 직원들이 열심히 뛰더라는 거죠. 그러다 보니 스스로 나가서 봉사활동도 더 하게 되고, 나가서 강의도 듣게 되고, 책도 더 읽게 되고. 그래서 지금 서울의 한 벤처기업에서 저희 제도를 벤치마킹하고 가치 포인트의 노하우를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이런 게 제가 조직을 관리하는 훈련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인 비법>

‘프로는 연습이 없다.’ 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얼핏 들으면 ‘그럼 연습 없이 항상 프로라는 건가?’ 그게 아니고 대중 앞에 설 때에는 ‘나는 이미 프로가 돼 있어야 된다’ 라는 말이지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단히 노력을 합니다. 아무리 멋진 아름다운 백조도 밑에서 발길질을 막 해서 우아한 것을 유지하듯이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늘상  강조하는 것은 ‘대중 앞에 나설 때는 나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만 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늦은 나이에 대학교를 다니면서 전공도 하지 않는 내가 [이미지 메이킹] 강의를 했어요. 사실 교수들도  깜짝 놀래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 국제매너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이건 내가 나중에 강의를 할꺼야.’ 하고 그 때부터 자료 준비를 시작했어요. 게다가 자료준비외에도 실제 걸음도 그렇게 걷고 옷도 제대로 챙겨입고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던 거에요. 그러니 기회가 오면 당연히 프로다운 모습으로 멋진 결과를 만들 수 있었어요. 


지역사회에서 저보다 사회를 잘 보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며칠 전에 축제 때 사회를 볼 때도 “당신은 지역사회에서 썩기엔 아까워.”라며 어떤 국장님이 “이 분 전국굽니다.” 라고 칭찬을 해줬어요. 중요한 건  사회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말은 잘하지만 아나운서처럼 세련된 언어를 쓰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그래서 다른 사람 몰래 아나운서 과정을 프로페셔널하게 완전히 마스터를 했어요. 심지어 MBC아카데미 교수회의를 할 정도로 말이지요. 




칭찬릴레이 200회 기념식





저는 무슨 일을 하던  “역시 당신은 다른 사람이었군요.”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만큼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완벽하게 챙기는 편입니다. 젊은 애들은 젊다는 이유로 적당히 연습을 하지만 아나운서 과정을 공부하는 동안에는 제가 서울에서 평택 갈 동안 차 안에서 발성 연습을 계속했습니다. 최하 30분은 하면서 가요. 목이 트일 때까지. 2년 가까이 발성 연습을 하니까 “회장님은 보이스톤이 달라요. 어떻게 말하시는 거죠?”라는 이야기들을 해주셨어요. 처음엔 그게 무슨 이야긴지 못 알아들었어요. 아나운서 과정에 갔더니 이미 목소리가 준비되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만큼 평상시에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예요.



대표님의 온,오프라인 소통법은? 


사실 지금까지는 너무 바빠서 가족간에는 제대로 소통을 잘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가족 간에 대화를 많이 나눠야만 소통이 될 텐데 그런 부분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그런데 다행스러운 건 요즘에 새로 시작한 사업 덕에 가족 간 소통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요. 가족 모두의 공통화제가 있으니 스트레스는 많지 않고 좋은 일만 있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남편이 도시락까지  싸줘요. 요즘 90%는 남편이, 10%는 며느리가 싸줍니다. 가정의 소통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직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회사내 소통이 조금 원활하지 못한 점이  있어요. 광고 기획 영업부의 한 팀장이 한 이야기인데 “함께 하는 봉사단체 활동을 왜 하게 됐냐면 회장님과 소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회장님과 가까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회장님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고 가까이서 봉사활동을 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듯이 저도 똑같아요. 나도 직원들과  똑같이 앞치마를 두르고 똑같이 고무장갑을 끼고 만두를 만들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하죠. 공감하며 소통하고 벽이 허물어지면서 좋아지는 것 같아요. 





소통을 위해서 제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잘 먹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도 마을을 잘 운영하는 비법으로도 소개된 적이 있었지요. 먹으면서 정을 나눈다고 하잖아요. 음식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같이 먹는 자리를 만들어서 소통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일과 소통의 시간은 철저히 분리합니다. 일할 때는 카리스마있게 끌고 간다면 풀어줄 때는 확실하게 풀어주면서 소통을 하는 거죠.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온라인은요. 사실 어려워서라기보다 게을러서 못한다고 생각을 해요. 처음에는 블로그를 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지 않았어요. 내가 거기 들어가서 할 시간이 있을까? 못하겠더라고요. 페이스북이 처음 생겼을 때 다른 지인분이 초대해주셔서 시작을 했어요. 지금 페이스북 친구가 1000명 정도,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800명 정도 되요. 그런데 그걸 누를 시간이 안 나는 거예요. 아무나 친구를 맺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오프라인으로도, 온라인으로도 제대로 소통하고 싶은 게 제 진심입니다. 


시간을 견디는 노하우는?


가장 힘들 때는 차를 운전해서 어느 언덕 위에다가 세우고 차 문을 다 열어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차 안이나 언덕 위에 몇 시간씩 앉아 있어요. 제 안에 있는 화를 풀어내는 거죠. 그러고 나면 맘 속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 사라지곤 하더군요. 자연 속에서 풀어내는 스타일이에요. 


한 번은 대전에서 일을 할 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거예요. 가정적으로, 회사적으로... 죽고 싶더라고요. 비가 엄청 쏟아지는 날 차를 끌고 대청댐에 갔어요. 몇 시간동안 울면서 차 안에 앉아 있었어요. 몇 시간이나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비가 우는지 내가 우는지 모르게 같이 울었어요.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가 힘든  어느 날은 다리 위에 서 본 적도 있어요. 어느 다리였는지 기억도 안나요. 그럴 때마다 내 어머니를 떠올렸어요. 내 친정 엄마가 나의 멘토요, 나의 스승이에요. 깊게 엄마라고 세 번만 부르면 저절로 눈물이 나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 엄마가 너무 고생을 하고 살았어요. 제가 2남 5녀의 장녀예요. 나는 엄마에게 가장이고 아버지고 남편이었어요. 내가 너무 힘든 순간 엄마가 나를 믿어주지 않았으면 못 버텼을 거예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니까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견디니 지금에 이르렀네요.  또 다른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나의 원동력은 엄마예요.


내 인생 최고의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는지?


89년 교차로를 만났을 때라고 생각해요. 남이 알아보지 못했던 세상을 바라본 나. 남이 찾지 못한 것을 찾아낸 나. 아무도 보지 못하고 나의 소득의 절반을 과감히 포기하고 선택했던 나. 그런 용기 있었던 내가 자랑스럽고 나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어요. 그때가 나의 타이밍이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첫째, 나같이 힘들게 배고파서 우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고 싶어요. 남들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맡겨두고 남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거에요. 나는 운 좋게 89년도에 교차로를 만나서 인생이 바뀌었어요. 물론 그것도 내가 선택을 한 거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거든요. 기회가 온지도 모르고 잡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기회가 온 걸 알고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가교역할을 하는 것. 또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멘토가 되어 주는 것. 그래서 그들이 나보다 좀 더 쉽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게 커다란 복지라고 생각해요. 두루뭉술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저에겐 정답이에요.



1004 데이 봉사를 마친 후 기념촬영



인터뷰 하는 내내 가슴 속 한 켠에 따뜻한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한국의 오드리 햅번을 만나고 있다는 감동 때문이었다. 지금의 김향순을 있게 한 결정적 이유를 물었더니 한 마디로 '신뢰'라고 말하는 평택,안성 교차로 김향순 대표.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고 큰 성공도 할 수 있었다는 그녀의 말대로 우리나라에 배고파서 우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 곧 올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우리도 오드리 햅번처럼 삶이 아름다운 김향순 대표가 있다고 자신있게 외치고 싶다. 


창의인재양성 300프로젝트에 취업정보의 메카, 교차로 후원으로 PYE Festival UCC 공모전을 하고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또한 김향순 대표님이 꿈꾸는 진정한 복지 중의 하나이기에 기꺼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http://cafe.naver.com/brand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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