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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e-사람] <엄마와 딸>을 쓴 문학계 50년 명인, 시인 신달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by 지식소통 조연심

소통인터뷰 & 토크쇼/조연심이 만난 e-사람

by 지식소통가 2013. 3. 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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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한 분야에서는 전문가라 칭할 수 있는 긴 시간임에도 그 시간을 훌쩍 넘어 50년 동안 오로지 글과 만나고 사랑하고 싸웠던 명인을 만났습니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그리고 교수이신 신달자 선생님!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어느 하나 흐트러짐 없는 꼿꼿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런 게 바로 진짜 명인의 아우라이겠지요. 신달자 선생님이 지금까지 오신 길을 되짚어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엄마와 딸]을 쓴 시인 신달자 @ 한국시인협회 사무실 사진:강정은

 

 

글 쓰는 재능을 언제, 어떻게 발견하게 되셨는지요?

 

중학교 시절 어머니의 권유로 잠시 황무봉 무용연구소에 다닌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무척 날씬했어요. 어릴 적 어리광부리는 모습이 예뻐서 무용을 시키셨던 것 같아요. 한국무용도 하고 북도 치고 하면서 내 마음에 가락, 운율이 생겼어요. 하지만 조금 다니다 보니 무용은 제 적성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지요. 그때의 무용의 운율과 춤사위 같은 것이 내 몸에 저장되어서 그것이 문자에 적용 되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다 제가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한 계기가 생겼답니다.

중2때 한 남학생을 사랑하게 됐어요.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잘하는 건 무용인데 내가 걔 앞에 가서 장구를 칠 수도 없고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해서 생각한 게 편지였어요. 그때 우리 집은 사업하는 집이에요. 아버지 책상에는 다 계산서 이런 책들이었어요. 친구 중에 국문과에 다니는 오빠가 있는 애가 있었는데 추석선물로 받았던 꽃무늬 고무신을 주고 그 집에서 책을 하나 빌렸어요. 그게 김소월 시집인데 필사를 전부해서 돌려 줬어요. 그 때부터 저의 베껴쓰기가 시작되었지요. 김소월시집을 가지고 몇 줄만 편지에 넣어도 완벽하게 나오는 거에요. 그때는 만나서 좋아한다는 얘기도 못하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막 베껴 썼어요. 편지를 한 몇 백 개 썼는데 문제는 한 번도 그 편지를 전하지는 못했어요. 나중에는 그 학생이 제가 지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우리 반 애들이 다 걔를 좋아했더라고요. 서울 아이니까 그랬나 봐요. 원래 중학교 때는 같이 동네에서 공부하는 애들은 다 찔찔이 같이 보이잖아요. 나만 좋아한 게 아니라 서울에서 온 그 아이를 전부 좋아했더라고. 나중에 내 친구 동생하고 결혼했어요. 말하자면 빼앗긴 거지. 하하하 중학교 때 이야기에요.

결국 한 번도 부치지 못한 연애편지 덕에 글쓰기 훈련 톡톡히 한 셈이죠.

고등학교 때 나는 부산으로, 그 남학생은 서울로 갔어요. 그 길로 끝이었죠.

 

저를 문인으로 키운 것은 아버지였어요. 아버지는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었어요. 부산에 있던 제게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라 하시면서 마음에 들면 용돈을 올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아버지는 제 중학교 시절부터 돌아가시던 88세까지 일기를 쓰셨어요. 그 정도로 글과는 인연이 깊었던 분이셨지요.

처음에 편지에는 용돈을 많이 타려고 "아버님 전상서~~~ 옥체 만강 하옵시고...." 이렇게 써서 보냈어요. 결국 용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지요.

"이 걸 다시 풀어서 써 봐라."

그래서 다시 베껴쓰기를 시작했어요. 학교 앞 서점에서 명언집 [톨스토이가 말했다] 이런 걸 샀죠. 편지 하나에 그거 두 개만 섞어도 아주 근사한 편지가 되었어요. 인용의 달인이 되어가기 시작했어요. 그 때 인용했던 말 중에 '불청객'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방학 때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야 너가 불청객이라는 말도 아는구나. 너가 이제 문자를 쓸 줄 아는구나’ 하셨지요. 사실 난 그때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그렇게 용돈이 올라가는 거에요. 그렇게 매주 편지를 쓰면서 베껴쓰기와 반복으로 글쓰기 훈련을 하게 되었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경남 백일장에서 1등을 해서 인정을 받은 거에요.

결국 모방을 하는 것도 뭔가 글에 대한 형상은 시키는 것 같아요. 그래서 1등한 거 가지고 특수 장학생으로 시험 안치고 숙대 국문과 들어 갔어요. 이형기,박제삼이 심사위원이었어요. 저는요 편지에서 계속 발전해서 그냥 국문과 들어가서 어떤 갈등 하나도 없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문학이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뭘 해 보겠다' 이런 생각을 안 해 봤어요. 자연적으로 한 길을 갔죠. 굉장히 길이 단순해요. '다른 걸 해 보겠다' 이것도 아니고 백일장 1등 하니까 국문과를 가고 여러 시인들 만나고 박목월, 서정주... 다 만나고 길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갈등 없이!

 

 

생활 속에서 글을 쓰시는 부분들이 흔들리지 않고 오셨잖아요.

글을 쓰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많을 텐데 선생님만의 훈련법은요?

 

확고하게 길이 정해진 후로는 모든 생활자체가 문학이었어요. 일상생활 자체 모든 게 그 안에서 생성된 거죠. 그렇다면 내 자신에게 묻는 게 중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데뷔해서 50년인데 그럼 '너는 지금 뭐가 되어 있냐?' 그런 걸 나에게 물어요. 그러면 다른 것은 포기도 하고 도전도 하고 더 잘되기도 하고 늦게 결혼해서 애 셋 낳고 나중에 석박사 했는데 그것은 노력하면 .교수까지 했고 그런데 시는 그렇지가 않아요. 한다고 해서 팍팍 올라가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도 수업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생각해요 졸업이 없고 평생 노력해야 하는 과목이 바로 시란 생각이 들어요.

 

어느 위치에 딱 놓여있다 이런 것도 없고 연애를 해도 남자한테 무릎 꿇어본 적이 없고 권력에도 무릎 꿇어본 적이 없는데 글 쓰는 일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어요. 그만큼 겸허해 질 수 밖에 없는 거에요. 해도해도 잘 안되니까 완성이 안 되니까.

 

 

찾은 재능을 훈련을 하면 온, 오프라인으로 소통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라고 하잖아요. 선생님이 글 쓰는 걸 가지고 소통하기 위해 하는 일이 어떤 일이 있는지요?

 

전 아무 것도 안하고요. 하는 것은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 밖에 없어요. 온라인, 그런 걸 할 줄도 모르지만 소통의 길을 너무 여러 개 내 놓으면 내가 또 피곤하고 그걸 감당하지도 못하고 이번에 [엄마와 딸] 같은 경우에는 보람 있는 일이 있었어요. 살아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게 여기 많이 나와요. [엄마와 딸]에요. 근데 어떤 여자가 전화 와서 자기가 사춘기 12살 때 엄마가 재혼을 했대요. 자길 고모집으로 보내고 그래서 자기는 그때 엄마를 다신 안본다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엄마가 시집간 지 25년이 지났는데 안 봤대요. 자기도 나이가 많고 엄마도 나이가 많은데 제 책을 읽고 엄마한테 연락을 했다면서... 그런 거는 책을 낸 이후에 참 보람인 것 같아요. 엄마가 죽고 나면 어디 가서 말하겠어요. 무덤에 가서 얘기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살았을 때 해야지. 어떤 것도 그래. 간단한 말도 삼키잖아. 나쁜 말은 하고 좋은 말은 삼키고.

 

[엄마와 딸] 책 쓰시고 정말 많은 엄마와 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계세요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쓰시게 되었는지요?

 

여자의 일생에 대해 많이 얘기하고 여자에 대해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게 일생동안 딸 여섯에 다섯째고 또 딸만 낳았고 여중,여고,여대 주로 여성들하고 생활을 많이 했어요. 결국은 여자에 대한 삶을 생각하게 되고 쓰게 되고 그래서 중심의 핵이 있어요. 몇 년 전부터는 10년이라고 해야 될까. 75년에 막내를 낳았어요. 둘째 70년에서 5년 터울을 두고 낳았잖아요. 그때만 해도 내가 셋째 딸을 낳고 시어머니한테 밉상으로 보이고 내가 무슨 큰 죄나 지은 것 같이.. 그러면서 든 생각이 우리나라 남아선호가 한 200년은 가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아무 죄 없이 딸만 낳은 것으로 죄인이 되어 버린 거에요. 내 옆방에 아들을 낳은 여자가 있었는데 거기는 꽃다발이 들어가고 우리 방은 조용했어요. 그랬는데 그때 그 막내아이가 지금 39세에요. 40년이 안 됐는데 변한 거잖아요.

요즘 신부신랑을 상대로 하나만 낳아야 한다면 뭘 낳겠냐고 하면 딸을 낳는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79%에요. 그런걸 보더라도 여자에 대한인식은 달라졌고 판검사도 여자가 훨씬 많잖아요.

 

 

 

그러면 여자가 남자를 누르고 더 잘 살게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뿌리를 가지고 있어요. 아직도 여자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그 밑 수행하는 사람 중에는 여자1 남자9 이렇잖아요. 정치부터 그렇게 하고 완전히 바뀌어 지진 않았지만 옛날보다 여자를 인정하는 것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거죠. 이런 시점에서 여성들이 잘해야 해요. 정신의 변화가 와야 돼요. 명품백을 드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를 명품으로 만드는 시점에 서있어요.

 

각 시인마다 대표작이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신달자의 대표시를 꼽는다면요?

 

저도 좋아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이 [등잔]이라고 있어요.

[등잔]은 인사동에서 백자 등잔을 하나 샀어요. 80년도인지... 사다 놓고 그땐 2,3천원 했을 거야. 근데 잊어버리고 10년쯤 후에 이렇게 보니까 내가 너무 안 바라봤던 거에요...

자기가 갖고 있는 물건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그 등잔을 깨끗이 씻어서 기름을 붓고 보니까 정말 너무 깨끗해진 거에요. 그리고 마지막에 그렇게 불을 켜보니 발끝까지 황홀한 불빛 그리고 아직도 여자인 그 몸 그래서 등잔이 나타나는 게 내 몸이 되면서 시가 그렇게 끝나는 그런 시입니다.

 

여자는 영원히 여자지요. 예전에 엄마는 여자가 아닌 줄 알았어요. 여자가 숨 쉬고 있다는 건 몰랐거든. 근데 내 자신을 바라볼 때 아직도 여자인 그 몸 이래서 백자 등잔의 매끄러운 몸이 나한테 이전되면서 여자로 딱 꽂히는 그런 시입니다. 남자들은 잘 몰라~

 

등잔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 시집 [아버지의 빛] 문학세계사 1999

 

 

 

여러 가지 소통 라인은 없고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써서 읽어주는 사람에게 전하는 거고. 또 하나 방법은 강연입니다. 많이 다니니까 그 두 가집니다. 글과 말!

 

 

지금까지 50여 년 작품생활 하셨는데 순탄하지만은 그 시간을 견디시는 선생님의 지혜를 들려주세요.

옛날에 고생한 얘기는 수없이 많이 해서 그건 두고 내가 나에게 물어 보죠.

'너는 그렇게 험난한 길을 어떻게 왔을까?'

나하고 의논을 해보는 거야. 결론적으로 우리 어머니의 지침이 있었어요.

내가 잘되지 않으면 난 죽지 못해요. 옛날 그 꼴로 엄마를 볼 수 없어. 엄마가 죽을 당시의 나의 모습으로 죽으면 엄마를 만날 수 없어요.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우리 딸들을 특히 여자들인데 어디 기댈 곳이 없어. 내가 잘되자 그것이고 세 번째는 사회적인 욕망이 강한 여잡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마 그것을 해냈을까 아무리 엄마와 자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 것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과 집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에요. 그런 세 가지가 내가 어려운 터널을 건너온 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좌로부터 신달자 선생님, 조연심, 이재관 사진: 강정은

 

 

살다보면 자신만의 때가 있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최고의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늘 지금이에요. 지금이 중요해요.

 

지금 일하는 엄마들이 많이 좌절을 하고 애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야 하고 남편한테 인정 못 받고 그런 3,40대 일하려고 하는 엄마들한테 한 마디 하신다면요?

 

일을 하려고 하는 여자들은 반드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견뎌야 할 것이 있어요. 절대로 무료가 없어요. 그런데 아이는 힘들죠. 하지만 그 아이가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엄마하고 같이 자라는 거에요. '힘들어' 이러면서 일 그만두고 아이 키우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그것도 정말 힘드니까. 하지만 나는 그냥 잘 견디라고 말해 주곤 해요. 사람을 써서 아이를 맡기고 자기가 받는 봉급을 다 주고나면 한 5~10만원 남는다고 해요. 그러면 그러지요.

"네가 벌어서 그 여자를 줘라. 그 과정에서 네가 얻는 것이 있다. 니 스펙은 쌓여지고 있는 게 아니냐. 그래서 시간은 24시간이지만 사용하는 것에 따라서 50시간도 되는 거다. 그걸 견뎌 내야하는 거다. 아이는 반드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한국시인협회에서 만든 김남조 시인의 시가 적힌 머그컵을 선물로 받았어요... 신달자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실려 있었고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절로 힐링이 되었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50년을 글만 쓰셨고 앞으로도 평생 글만 쓰고 사실 신달자 선생님의 인생 앞에서 이제 갓 첫 발을 뗀 초보 글쟁이로서 글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큰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다.

 

 

3월 16일 노래하는 엄마, 인순이에게 [엄마와 딸] 사인을 해 주고 계신 신달자 선생님

조연심에게도 사인을 해 주고 계시는 신달자 선생님...

신달자 선생님의 책 [엄마와 딸],[여자를 위한 인생10강]을 들고 기념촬영.. 그런데 흔들렸다,, 사진은 강정은...

 

신달자의 [엄마와 딸], 인순이의 [딸에게]

 

3월 16일 교보문고 주최 "글쓰는 엄마, 노래하는 엄마의 특별한 만남! 신달자, 인순이 토크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다. 진행하는 입장에서도 기대가 된다.

좋은 자리 허락해주신 교보문고, 명진출판, 민음사 관계자 분들게 감사드리고 특히 제 인생의 큰 어른이신 신달자, 인순이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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